무려 한달 반 만에 다시 올리는 자작 야소설(4화)...
원래는 한화 분량 쓸 때마다 여기에 올릴 생각이었는데, 쓰다보니까 분량 생각은 잊고 한번에 두 화 좀 안되는 분량을 써버렸지 뭐얌
그래서 이렇게 늦게 올림 ㅎ... ㅈㅅ
이전 글들은 내 닉네임으로 검색하면 나오고
이번에 써온거는 일단 글 두개로 나눠서 올릴 예정
즐감
“다 마셨으면 이제 슬슬 일어나자. 아직 둘러봐야 할 곳이 좀 있거든.”
남자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갑을 푼 덕분인지, 햇빛을 쬔 덕분인지, 혹은 허브차 덕분인지 몰라도 긴장은 많이 풀린 상태였다. 물론 완전히 풀렸다고는 빈 말로도 못 하지만 적어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는 몸 상태가 나아져있었다.
“잔은 그냥 둬. 나중에 치울테니까.”
그리 말하고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에서 이어진 복도 한 쪽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까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다시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수갑도 풀렸는데 확 도망쳐버릴까 라는 생각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실행은 논외로 취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정보가 너무 적다. 실행은 커녕 아직 계획 검토 단계도 이르다. 뭐가 됐든 일단은 얌전히 안내를 받는 것이 상책이었다.
식당? 으로 추정됐던 방금 그 공간에서 벗어나니 다시 비슷비슷하게 생긴 복도가 이어졌다. 방에서 식당까지 거리가 조금 있었으니까 다음 장소까지도 좀 걸어야 할 거라고 예상을 했지만, 예상 외로 금방 나는 다음으로 안내받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넋을 잃었다.
“어때, 멋지지 않아?”
짧지만 자신감이 흐르는 한마디였다. 그 말에 나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드넓은 잔디밭이 싱그러운 녹색으로 빛나고, 가지런히 다듬어진 나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불어온 바람이지,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 정원만 천장이 뚫려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쏟아져내리는 햇빛이 아름다웠다.
“내가 가꾸는 정원이야. 보다시피 천장이 뚫려있으니까 바깥 공기 쐬기에 좋지. 벤치랑 탁자도 설치해놓은 게 있으니까 앉아서 쉬어도 되고. 그 외에는, 음, 일단 슬리퍼가 준비되어있기는 한데⋯⋯.”
남자가 입구를 지나쳐서 정원에 발을 디뎠다. 신발은 신지 않은 채였다.
“이렇게, 벌레같은 건 제대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맨발로 나와도 아무 문제 없어. 감촉도 나쁘지 않고 꽤 시원한데, 들어와볼래?”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거부할만한 이유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네.”
거부하기는 커녕 솔직히 조금 두근거릴 정도였다. 나는 원래 산책하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숲이니 산이니 여기저기를 쉬지않고 돌아다녔고, 커서 학교에 들어가서도 좀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매년 학년이 올라갈수록 숨통을 조여오는 학업 때문에 제대로 못 돌아다녀본지 꽤 됐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상황은 순수하게 기뻤다. 물론 납치당한 마당에 이걸 고맙게 여겨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남자를 따라 정원에 발을 디뎠다. 조금은 고민이 됐지만, 신발은 신지 않았다.
“아흣.”
차갑고 간지러운 잔디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익숙치 않은 감촉이었다. 하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구태어 말하자면 ‘좋은 감촉’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미묘하긴 했지만, 뭐라고 할까⋯⋯ 상쾌한? 신선한? 감촉이었다. 그래, 그 정도 표현이 딱 어울렸다.
“와아⋯⋯.”
“마음에 들어?”
“네⋯⋯.”
안에 들어와서 직접 둘러보는 정원의 모습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햇빛도 따스하고, 어깨를 쓰다듬는 초봄의 서늘한 바람이 기분좋았다. 나무들 덕분인지 공기도 맑았다. 나무들 사이사이 조화롭게 피어오른 꽃들 덕분에 눈이 참 즐거웠다. 나무 향기가 시원했다. 꽃 냄새는 은은했다. 두 향기가 섞이고 맑은 공기가 더해지자 숨쉬는 것 마저도 즐거웠다. 이런 게 얼마만일까. 참으로, 정말로 오랜만에 행복감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여기도 감옥의 일부이지 않은가?
“⋯⋯.”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생각이 식어갔다. 우울감이 스멀스멀 발치에서 꾸물거렸다. 꿈에서 깬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맞다. 잊을뻔 했다. 여기는 결국 감옥이다. 나를 납치한 사람이, 나를 가두어두기 위해 준비한 정성스럽기 짝이 없는 감옥이다. 오랜만의 자연 산책? 조금 두근거려? 말도 안되는 소리. 원할 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확실히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산책이고 뭐고 아니다, 이곳에 갇혔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나는 대체 뭘 즐거워하고 뭘 기뻐하고 앉았나. 납치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비교적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내쉴 수는 없었다.
방금까지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정원에서 이제는 거부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정원의 아름다움은 방금 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납치감금’이라는 끔찍한 상황속에서, 그런데도 눈앞에 있는 광경이 참 아름답다는 현실에 나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은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슬슬 가자. 봐둬야 할 곳이 많아.”
타이밍도 좋았다. 남자가 먼저 정원에서 나가고 나도 냉큼 그 뒤를 따랐다. 망설임은 없었다.
정원에서 나가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정갈하지만 다소 삭막함도 느껴지는 복도가 이어졌다. 새삼 다시보니 상당히 감옥같은 인상의 복도였다. 쓸데없는 장식 없이 밋밋하고도 간소한 게 적어도 방금 그 정원 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감옥다웠다’. 내게는 그리 느껴졌다.
⋯⋯그런데 이 감옥같은 복도가 아까 그 아름다운 정원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내 기분 탓일까?
그렇잖은가. 감옥을 보고 편안함을 느끼다니, 그게 무슨⋯⋯ 아니, 됐다. 머릿속을 억지로 비웠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도 그 정도는 용납되겠지. 잠시동안만이라도 멍하니 있고싶었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남자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